이승수 한국환경연구원 연구위원
(seungsoo@kei.re.kr)
우리가 사회기반시설을 짓고 지켜 온 방식에는 하나의 조용한 가정이 깔려 있다. “과거의 통계가 미래를 대표한다”는 정상성(stationarity)의 가정이다. 100년에
한 번 올 법한 홍수를 견디도록 제방을 쌓고, 확률적으로 발생 가능한 최대 유입을 감당하도록 댐을 설계하며, 20~30년 빈도의 강우를 배제하도록 하수관로의 지름을 정할
때, 그 확률의 근거는 언제나 과거의 관측 기록이었다. 미래의 기후가 과거와 통계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것이 근대 수공학(水工學)이 서 있는 지반이었다.
기후위기는 바로 이 지반을 흔들고 있다. 강우의 빈도와 강도가 과거 통계의 범위를 벗어나면서, 우리가 방어선을 그어 둔 기준선 자체가 이동하고 있다. 방어선을 아무리
정교하게 그어도, 그 선을 정한 근거가 무너진다면 안전은 담보되지 않는다. 이 글은 기후위기 시대에 기반시설의 위험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으며, 그 변화를 왜 기존의
안전관리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지, 결국 관리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수자원 분야를 중심으로 짚어 보려 한다.
논의의 범위를 먼저 분명히 한다. 「지속가능한 기반시설 관리 기본법」(이하 「기반시설관리법」)은 도로·철도·공항·항만에서 하천·댐·저수지·하수도에 이르는 15종의 시설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할 기반시설로 규정한다. 이 가운데 물과 직접 관련된 시설은 방재시설인 하천·저수지·댐과 환경기초시설인 하수도, 공급시설인 수도이며,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홍수방어 기능이 직접적인 하천(제방 포함)·댐·하수도로 범위를 한정한다. 하천·제방·댐이 강물의 범람으로부터 지키는 외수(外水) 방어시설이라면,
하수도는 도시에 내린 빗물을 신속히 빼내는 내수(內水) 배제시설이다. 기후위기는 이 두 방어선을 안팎에서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극한강우의 설계빈도 초과, 그 상시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강우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2022년 8월 8일 서울 동작구에는 시간당 141.5mm의 비가 쏟아졌다. 이는 1942년의 기록(시간당
118.6mm)을 80년 만에 갈아치운 서울 관측사상 최고치였고, 재현빈도로 환산하면 500년 빈도를 넘어서는 강우였다(한국경제 2022; SBS 2022). 문제는
이것이 예외적 단발사건이 아니라는 데 있다. 2020년 여름 한반도는 중부지방 기준 54일에 달하는 역대 최장 장마를 겪었고, 그해 여름 집중호우와 연이은 태풍으로
46명이 목숨을 잃고 약 1조 2,585억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최근 10년(2010~2019) 연평균 피해의 3배를 넘는 규모였다(기상청 2021).
2025년 7월의 집중호우 피해액은 1조 848억 원으로 집계되어, 단일 호우 사상으로는 최근 10년 자연재난 중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농민신문 2025). 극한강우가
이제는 몇십 년에 한 번의 이변이 아니라, 해를 걸러 반복되는 상수(常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가 기반시설에 던지는 함의는 냉혹하다. 500년 빈도의 강우가 실제로 내린다면, 30년·50년 빈도로 설계된 도시 하수관로나 100년 빈도로 설계된 제방은 설계
상태 그대로도 넘칠 수밖에 없다. 시설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시설이 방어하도록 설정된 기준 자체가 현실의 외력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풍·집중호우의 빈발과 기반시설망의 연쇄 취약성 상당한 홍수피해를 유발하는 태풍과 집중호우의 발생 빈도가 늘고 있다는 것은 이제 특별한 논증이 필요 없는, 우리 모두가 체감하는 현실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극한사상 앞에서 기반시설이 무너지는 ‘방식’이다. 2026년 7월 중국 저장성에 상륙한 제9호 태풍 바비(Bavi)의 사례를 보자. 시간당 120mm에 이르는 폭우와 강풍은 상하이·항저우 등지에서 항공편 2,800편 이상을 결항시키고 열차 1,600여 편을 멈춰 세웠으며, 도시침수와 산사태가 이어졌다(한국경제 2026; 아주경제 2026; 머니투데이 2026). 개별 시설 하나하나의 성능과 무관하게, 교통·전력·하천이 서로 얽힌 도시 기반시설망 전체가 연쇄적으로 기능을 잃은 것이다. 오늘의 기반시설은 낱개의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의 망(網)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극한강우가 빈발할수록 위험은 개별 시설의 파손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마비라는 형태로 커진다. 1
취약 공간으로의 피해 집중 여기에 시설의 성능이 세월과 함께 저하되는 노후화가 겹치면서, 외력과 취약성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의 시설이 뚫렸을 때 피해가 그 지점에 머물지 않고 하류와 저지대, 지하공간으로 전파된다는 점이다. 하천 제방의 붕괴는 배후지의 침수로, 도시 하수도의 용량 초과는 반지하와 지하차도의 인명피해로 이어진다. 2022년 수도권 집중호우 당시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 주택에서 일가족 세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도시의 내수 배제 시설이 극한강우를 감당하지 못했을 때 그 결과가 가장 취약한 공간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시켰다(서울신문 2022).
기후위기가 키우는 것은 강우의 크기만이 아니다. 극한강우가 상시화될수록 관리 실패가 ‘드러날’ 확률과 그 대가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과거에는 큰 비가 오지 않아 운 좋게 넘어갔을 부실이, 이제는 반드시 시험대에 오르고 참사로 귀결될 확률이 증가한다.
정상성 가정 위에 선 설계빈도 체계 기존 안전관리의 첫 번째 한계는 앞서 말한 정상성 가정에 있다. 설계빈도 체계는 본질적으로 과거 강우 통계의 산물이며, 그 통계가 미래를 대표하지 못하는 순간 기준은 실효성을 잃는다. 기준을 100년에서 200년 빈도로 상향해도, 기후가 계속 변한다면 그 새 기준마저 머지않아 초과된다. 방어선을 높이는 속도가 위험이 커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동하는 표적(moving target)’ 문제다. 설계빈도의 상향은 필요하되,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개별 시설·기준 충족 중심의 관리 두 번째 한계는 관리의 시야가 개별 시설과 구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제방은 제방대로, 하수관은 하수관대로, 기준을 충족하는지(pass/fail)를 점검하지만, 유역 전체에서 물이 어떻게 흐르고 위험이 어디로 집중되는지는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는다. 2023년 7월 오송 궁평2지하차도 참사는 이 한계가 어떻게 참극으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준다. 미호천교 확장공사를 위해 기존 제방을 무단으로 철거하고 하천법 규격에 미달하는 부실한 임시제방을 세운 뒤 이를 방치한 결과, 임시제방이 월류·붕괴하며 인근 지하차도로 강물이 밀려들어 14명이 목숨을 잃었다(국무조정실 2023). 이 사고의 본질은 ‘전례 없는 강우’가 아니라, 기준에 못 미치는 시설을 관리 체계가 걸러내지 못한 데 있었다. 설계빈도의 문제이기 이전에 시공과 감독, 즉 관리의 실패였고, 부실 임시제방을 시공한 현장소장에게는 결국 징역 6년이 확정되었다(한국일보 2025).
사후 복구 중심의 관성 2020년 창녕 이방면에서 낙동강 제방이 붕괴한 원인으로 모래 지반의 파이핑(piping) 현상이 지목되었고(경남도민일보 2020), 같은 해 섬진강댐은 급격한 방류를 늑장 통보하여 하류주민의 피해를 키웠다는 논란 끝에 주민 8,430명이 배상을 신청하는 대규모 배상 절차로 이어졌다(경향신문 2022; 시사IN 2022). 하나는 시설의 구조적 취약성, 다른 하나는 운영·관리의 실패라 할 수 있다. 두 사례 모두 강우의 크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사후복구에 매년 조 단위 예산을 투입하는 대응 중심의 관성만으로는 반복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위험을 사전에 진단하고 우선순위를 매겨 관리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초과홍수를 전제한 페일세이프(fail-safe) 설계 기준의 상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전환의 출발점은 발상 자체에 있다. 즉 방어선이 뚫릴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설계기준을 초과하는 홍수는 반드시 온다. 그렇다면 제방이 넘치더라도 급격히 붕괴하지 않도록 하고(내구성·여유고 확보), 물이 넘칠 때 인명피해가 없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며(계획적 침수구역·비상 방류로), 지하공간 등 취약 지점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페일세이프 개념이 설계와 운영에 내장되어야 한다. 오송 참사가 뼈아픈 것은, 방어선이 뚫린 뒤 지하차도로 물이 몰려드는 최악의 경로를 아무도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스크 기반 우선순위 관리 뚫림을 전제한다면 다음 질문은 ‘어디가 뚫렸을 때 가장 치명적인가’이다. 한정된 재원으로 모든 시설을 동시에 보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붕괴 확률과 그로 인한 인명·자산 피해의 규모를 곱한 리스크(risk)를 기준으로, 어느 시설을 먼저 손볼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관리로 나아가야 한다. 기준 충족 여부(pass/fail)의 이분법에서, 위험의 크기를 정량화하여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으로의 이행이다.
비정상성을 반영한 설계기준 재평가 물론 설계기준의 갱신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 통계에 기반한 정상성 빈도분석을 넘어, 기후변화 시나리오와 비정상성(non-stationarity) 빈도분석을 반영하여 주요 시설의 설계외력을 재평가해야 한다. 다만 이는 기준을 한 번 올리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변화하는 강우를 전제로 기준의 타당성을 주기적으로 갱신하는 체계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유역 단위 통합관리와 그레이-그린 결합 관리의 단위도 개별 시설에서 유역과 시스템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제방을 계속 높이는 구조물(그레이 인프라) 일변도에서 벗어나, 천변저류지·유수지·자연기반해법(NbS: Nature-based Solutions) 같은 그린 인프라를 결합하여 유역 전체의 물그릇을 키우는 접근이 필요하다. 외수(하천)와 내수(하수도)를 분리해 관리하던 칸막이도 낮추어, 도시침수 대응을 유역 물관리와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모니터링·디지털트윈 기반 적응형 관리 마지막으로, 고정된 기준에 시설을 맞추는 관리에서 실시간 감시와 예측에 기반해 대응을 갱신하는 적응형 관리(adaptive management)로 나아가야 한다. 센서 계측과 디지털트윈을 통해 시설의 상태와 유역의 수문 상황을 상시 감시하고, 위험이 임계에 다다르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체계다. 앞서 말한 설계기준의 주기적 갱신도, 리스크 우선순위의 조정도, 결국 이 감시와 갱신의 순환 속에서만 살아 있는 기준으로 유지될 수 있다.
기후위기가 기반시설에 던지는 도전의 본질은, 우리가 오랫동안 의지해 온 정상성이라는 전제의 종언에 있다. 미래가 과거와 같으리라는 가정 위에서 방어선을 긋고 그 안전을
확신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방어선을 계속 높이는 경쟁이 아니라, 방어선이 뚫릴 것을 전제로 피해를 관리하는 사고의 전환이다.
이는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관리에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위험을 관리하는 방식으로의 이행을 뜻한다. 설계기준을 갱신하고, 리스크로 우선순위를 정하며,
초과홍수를 전제해 페일세이프를 설계하고, 유역 단위로 통합하며, 실시간 감시로 적응하는 일련의 전환이 함께 가야 한다. 기후위기 적응을 위한 기반시설 안전관리 강화란
결국, 위험을 ‘없앨 수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안고 관리한다’는 겸손한 현실주의로 관리 철학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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