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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의 서가

익숙함을
낯설게 바라보기

양은모 국토연구원 부연구위원
(emyang@krihs.re.kr)

빈곤 해방
(The Life You Can Save)

피터 싱어 저
함규진 역


당신은 출근길에 연못에 빠진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지 않으면 아이는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연못은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하지만, 당신에게는 물이 깊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다만 만약 당신이 물에 뛰어들어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한다면, 입고 있는 새로 산 신발과 양복이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고, 회사에도 지각할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로 잘 알려진 질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발이 더러워지거나 회사에 지각하는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아이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눈앞에서 한 아이가 죽어가는데 새 신발을 걱정하며 지나치는 선택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시선을 연못 밖으로 돌리면 이야기는 조금 복잡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수많은 아이가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한 채 죽고 있으며 1, 그중 상당수는 예방 가능한 원인으로 목숨을 잃는다. 우리가 신발 한 켤레를 사는 데 쓰는 돈으로 마련할 수 있는 안전한 식수나 의약품이 없어서 죽는 아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눈앞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새 신발을 포기할 수 있는 우리는, 왜 멀리 떨어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같은 비용을 선뜻 포기하지 못하는가?

『빈곤 해방(The Life You Can Save)』의 저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우리에게 아주 낯선 철학자는 아니다. 2021학년도 생활과 윤리 모의평가에서 논란이 되었던, ‘존 롤스와 피터 싱어’ 문제의 바로 그 철학자이다. 2 『빈곤 해방』은 2009년 처음 출간된 『The Life You Can Save』 의 10주년을 맞아 개정된 책이다.

피터 싱어의 『빈곤 해방』은 바로 이 불편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책에는 이와 비슷한 사고실험과 사례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눈앞에 보이는 위험에 처한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도 기꺼이 감수하면서, 같은 비용으로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훨씬 인색해지는 우리의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집요하게 되묻는다.

피터 싱어는 무엇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철학자다. 저서 『동물 해방』을 통해 현대 동물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EBS의 ‘위대한 수업’이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 강의를 추천하고 싶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느냐와 별개로,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선택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의 사고방식이 꽤 강렬하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나에게 피터 싱어의 질문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다. 나는 개개인은 모두 이성적이다(rational)라는 가정 아래, 희소한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도록 만드는 인센티브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그러한 선택들이 제도와 시장 안에서 어떻게 조정되는지를 설명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했던 나에게 피터 싱어의 책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아쉬운 점은 내가 하필이면 심리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박사과정 시절 피터 싱어의 책에 심취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학위논문의 게임모형에서 참여자(player)들을 이타주의적 유형과 이기주의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가정했고, 덕분에 게임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해졌다. 균형값을 구하느라 적지 않게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억울하기까지 하다.

사실 이 책을 소개하기까지 오래도록 망설였다. 내가 이 책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나의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나는 여전히 피터 싱어의 급진적인 실천철학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책에서 제시하는 맹인 안내견 3 사례도 그렇고, 책 말미에 직접 제시한 ‘효과적인 자선단체’ 목록 4이나 구체적인 기부율 5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었다. 내가 선뜻 동의할 수 있는 책만이 좋은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내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에 질문을 던지고, 이미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책은 마음 한켠에 오래도록 남는다. 『빈곤 해방』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책이다. 내가 찾아낸 균형이 정말 최적의 해인지, 애초에 내가 세운 목적함수가 타당한 것인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10만 원을 소비할 때 내가 얻는 한계효용과 그것을 기부했을 때 얻는 효용을 비교하여 선택하는 것은 지극히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피터 싱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피터 싱어는 왜 그 계산에서 ‘나의 효용’에 특별히 더 큰 도덕적 가중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내가 조금 덜 누리는 것으로 다른 누군가가 훨씬 큰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그 선택을 단순히 개인의 선의나 자선의 문제로만 볼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국제개발협력의 문제도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피터 싱어의 논리에 따른다면, 현재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 규모는 부유한 국가가 가난한 국가에 제공해야 할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할 것이다. ODA 규모 결정에는 현실적인 재원의 제약도 있고, 국가와 정부가 부담해야 할 책임의 범위에 대한 다양한 견해도 작용할 것이다. 지원 규모뿐 아니라 효과성과 지속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선택한 방식이 정말 최선인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는 점에서, 피터 싱어가 주는 불편함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어쩌면 ‘싸구려 동정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는 감정을 한 실천철학자가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지,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그러다가도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도 분명히 있기에, 책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남는다.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들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제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갖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제도의 개선으로 더 많은 효용과 사회적 잉여를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얻은 지금의 잉여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고민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얻은 효율이 더 많은 사람의 삶을 나아지게 하고, 가능하다면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최소화되도록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은 연구자가 되고 싶다.

이 책이 그 답을 모두 알려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새로운 물음표 하나를 더해준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익숙했던 생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작은 물음표 하나가 남기를 바라며, 이 책을 추천한다.


필자 약력

양은모 부연구위원은 2018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국토연구원 글로벌개발협력센터 부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관심이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경제, 개발경제, 환경경제, 국제개발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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