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ymlee@ewha.ac.kr)

조선시대의 중산간은 화전 농업과 목마장 운영, 그리고 왜구를 막아내는 방어 거점으로서 독자적인 생산 잠재력을 발휘하던 제주의 안전한 삶터이자 행정의 중심축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20%를 상회하던 중산간 인구 비율이, 1950년대 들어서자 10% 미만으로 급감해 있었다. 자연환경적 조건(용천수) 때문이라면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인구가 적었어야 마땅한데, 왜 하필 20세기 중반을 거치며 중산간 마을들이 이토록 급격히 소멸하고 황폐화되었는가?
지난 여름 제주에서의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완만한 오름, 아기자기한 카페들로 포장된 대중적 관광지의 일차원적
소비자로만 머물지 않겠다는 것. 수려한 자연 풍광 뒤에 숨겨진 제주 사람들의 고단한 삶, 그리고 그들이 터 잡은 장소의 결 속에 깊게 파인 주름까지 온전히 읽어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인문학적 탐색의 길잡이로 들고 간 책이 바로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1978)과 대하소설 『제주도우다』(2023)였다. 제주를 가볍게 소비하기에 앞서, 제주의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어우러져 왔으며 어떠한 폭력 속에서 그 삶의 터전이 파경을 맞았는가를 이해하는 일, 즉 4·3사건의 내막과 그것이 남긴 공간적 궤적을 돌아보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의무와도 같았다.
혹자는 지리학자가 왜 4·3사건에 관심을 갖는 것인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4·3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한 페이지에 그치지 않고, 학부 시절
문화·역사지리학이라는 학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게 한 깊은 울림이었다. 자연과 풍토 속에서 형성된 장소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그 터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조용히 추적하는 일… 그것은 청년 시절 청계천 책방에서 시작된 작은 질문이자, 지금까지 연구자로서 소박하게 이어온 탐구의
과정이었다.
한라산과 중산간 지역 ⓒ 저자 촬영
내가 『순이삼촌』을 처음 접한 것은 군부정권의 철권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84년 어느 봄날이었다. 당시 그 책은 정권에 의해 발간과 유통이 금지된 엄연한
‘금서(禁書)’였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매캐한 책 먼지 속에서 우연히 그 책을 손에 넣었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던 알 수 없는 전율과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단숨에
책장을 넘겨가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교과서나 언론에서는 단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제주의 아픈 진실이 그곳에 있었다.
나에게 제주는 타향이 아닌 뿌리의 공간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고향이 제주였고, 지금도 고향 마을에는 친척분들이 살고 계신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참으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친척 어르신들 앞에서 4·3사건에 대해 슬쩍 이야기라도 꺼낼라치면, 어르신들의 표정은 이내 삼엄하게 얼어붙었고 서둘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시곤 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숨기면 두 배가 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시절 제주인들은 슬픔을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와 형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사상범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이던 시절, 제주 사람들은 그 슬픔을 가슴속 깊이 삭이고 굳혀 묵묵히 버텨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현대사의
비극으로 재평가된 오늘날과 달리, 당시는 말할 수 없는 침묵 자체가 생존을 위한 유일한 갑옷이었다. 도민들의 가슴에 새겨진 그 깊은 침묵이야말로 4·3사건이 남긴 가장
가슴 아픈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른다.
제주 해안마을의 용천수 ⓒ 저자 촬영
함덕 마을과 함덕 해수욕장 ⓒ 저자 촬영
그 침묵의 진실을 발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학부 4학년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가방을 메고 제주도 조천면(현 조천읍)으로 향했다. 사촌동생이 모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고 면사무소와 리사무소의 먼지 쌓인 낡은 호적부와 관련 기록들을 뒤졌으며, 해안에서 한라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중산간 마을들을 누비고 다녔다.
그때 지리전공 학부생인 나를 사로잡았던 근본적인 의문이 있었다. 당시 지리 교과서에 실린 제주도 취락 입지의 공식은 단호했다. “제주도는 현무암 지질 특성상 빗물이
지하로 빠져나가 물이 귀하므로, 용천수가 솟아나는 해안가를 따라 인구와 취락이 집중되어 있다.” 사람이 물을 따라 거주한다는 환경결정론적인 설명이었다.
그러나 내가 현장에서 수집한 역사적 사료와 인구 통계 데이터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용천수가 상대적으로 드물긴 하지만 중산간 지역(해발 100~500m 지대)에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큰 마을들이 수두룩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입수했던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리(里) 단위 인구 통계에 따르면, 제주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수만 명의 도민들이 중산간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선사시대 유적은 산록과 해안에 걸쳐 있었고, 고려 후기 원(元) 간섭기에는 몽골족이 한라산 해발 200~600m 산복 지대에
불을 놓아 수평적 환상(環狀) 초원 지대를 만들고 대규모 국영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했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가축의 농경지 침범을 막고 목장을 구획하기 위해
상잣성, 중잣성, 하잣성이라는 거대한 돌담 장성을 축조한 곳도 바로 이 중산간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산간은 개척의 절정을 맞이했다. 세종 5년(1423년), 안무사 정상국의 건의로 정의현(旌義縣)의 행정 치소(治所)를 바닷가의 고성마을(현 성산읍
고성리)에서 내륙 중산간의 성읍마을(현 표선면 성읍리)로 전격 이전한 사건은 결정적이다. 해풍과 태풍의 피해가 막심하고 농경에 부적당하며, 수시로 침입하는 왜구의 약탈과
살육을 피하기 위해 행정 중심지를 중산간으로 옮겼던 것이다.
대정현(大靜縣) 역시 마찬가지였다. 1416년(태종 16년) 제주가 삼읍(三邑)으로 분현될 당시, 대정현은 거센 해풍과 외적의 위협에 직면한 해안가 모슬포(현 대정읍
하모리) 대신, 단산과 산방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내륙 중산간 산록(현 인성·안성·보성리 일대)에 대정읍성을 구축하고 행정 거점을 다졌다. 이 내륙 중산간 지대는 거친
바닷바람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모태이자, 배후의 넓은 중산간 농경지와 목마장을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중산간은 화전 농업과 목마장 운영, 그리고 왜구를 막아내는 방어 거점으로서 독자적인 생산 잠재력을 발휘하던 제주의 안전한 삶터이자 행정의 중심축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20%를 상회하던 중산간 인구 비율이, 1950년대 들어서자 10% 미만으로 급감해 있었다. 자연환경적 조건(용천수) 때문이라면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인구가 적었어야 마땅한데, 왜 하필 20세기 중반을 거치며 중산간 마을들이 이토록 급격히 소멸하고 황폐화되었는가?
성읍리(구 정의현)의 전통가옥 ⓒ 저자 촬영
대정현 성지(대정읍) ⓒ 저자 촬영
그 인구 감소와 공간 소멸의 이유는 바로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수탈과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이었다.
중산간의 1차적 낙후는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과 해상 물류 수송의 편의성을 위해 해안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1917년 제주 도민들의 혹독한
강제 부역을 통해 해안 일주도로가 개통되면서 물자 유통이 해안가로 집중되었고, 전통적으로 중산간에 있던 면사무소들이 해안 포구 마을로 연쇄 이전했다. 구우면(현 한림읍)
사무소가 중산간의 명월리에서 항구로 개발된 한림리로, 정의면(현 표선면) 사무소가 성읍리에서 표선리로, 서중면(현 남원읍) 사무소가 의귀리에서 남원리로 옮겨간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일제의 해안 중심 개발이 공간적 소외를 초래한 1차적 계기였다면, 해방 후 발생한 4·3사건은 중산간 공동체를 물리적으로 해체하고 파괴한 비극의 결정판이었다.
해방 후 38선 이남의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되었다고 하나, 한라산에 들어간 소위 무장 유격대(‘산군’)의 실체는 300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반면 이들을 진압하겠다며 섬으로 들어온 서북청년단(약 1,500~2,000명 추정)과 군경 토벌세력의 폭력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 중산간에 살던 대다수의 도민들은 거창한 이념 따위는 알지도 못했고, 그저 밭을 갈고 소를 키우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시급했던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소설의
제목처럼 ‘남’도 ‘북’도, ‘좌’도 ‘우’도 아닌, 그저 “제주도우다(제주도입니다)”라고 말하는 평범한 민초들이었을 뿐이다.
어이, 상옥이, ‘공장은 노동자에게! 토지는 농민에게!’ 그거 좋은 말이긴 한데, 우리 제주도 실정에 맞는 소리도 좀 해보라게. 그 말은 우리 제주도엔 맞지 않아. 우리 제주도는 공장도 없고, 농민 대부분이 자작농이란 말이여, 자작농! 소작농이 없어. 여기는 육지부와 달리 빈부격차가 별로 없는 곳이여. (중략) 상옥아 너 자꾸 사상, 사상 하는디, 사상은 너같은 멋쟁이나 하는 놀음이여. 사상이 뭐 밥 먹여주나? 곡식은 사상이 키우는 게 아니여. 곡식을 키우는 건 그런 거창한 사상이 아니라 적당한 햇빛과 비, 그리고 사람의 손이여. (중략) 난 장바이 성님의 무정부주의가 마음에 들어. ‘우리는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다’라는 말이 난 좋아. 작년에 삼팔선이 그어진 직후에 일본에서 귀향민이 들어올 때 맥아더 사령부가 물었주, 남과 북 중에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고. 그 때 우리 제주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했주. ‘우리는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다!’ 『제주도우다』 2권 중 주인공들의 대화 중 ‘박털보’가 한 말
역사지리학이 문헌과 기록으로 공간의 구조와 변천을 차분히 짚어낸다면, 현기영의 문학은 그 위에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생생한 숨결과 장소에 깃든 처참한 기억을 오롯이
되살려 놓는다.
소설 『순이삼촌』은 1949년 1월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다룬다. 소설 속 가장 강렬한 공간적 심볼은 ‘옴팡밭(오목하게 파진 밭)’이다.
참혹했던 비극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순이삼촌은,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옴팡밭’이라는 물리적 장소이자 내면에 깊이 얽힌 트라우마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밭을 갈다 땅속에서 돋아나는 돋보기안경 알이나 탄피, 뼛조각들은 시간을 1949년으로 정지시키고, 그녀의 삶을 평생의 유배지로 만들어 버린다. 현기영은
순이삼촌의 환청과 신경통을 통해 4·3이 과거의 역사가 아닌 ‘특정 장소에 갇혀버린 현재 진행형의 트라우마’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최근의 대작 『제주도우다』에서 현기영은 학살 이전 중산간 지역에서 피어났던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완벽히 복원해 낸다. 심방의 굿소리가 울려 퍼지고, 곶자왈을
누비며 우마를 공동 방목하고, 숯을 굽고, 고사리를 채취하며 서로를 보살피던 ‘수눌음(품앗이)’ 공동체.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들이 불타오를 때 사라진 것은
가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주 민중들이 수 세기에 걸쳐 일구어온 생태적 삶의 양식과 인류학적 공동체의 완벽한 도살이었다.
역사지리학이 문헌과 기록으로 공간의 구조와 변천을 차분히 짚어낸다면, 현기영의 문학은 그 위에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생생한 숨결과 장소에 깃든 처참한 기억을 오롯이
되살려 놓는다.
소설 『순이삼촌』은 1949년 1월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다룬다. 소설 속 가장 강렬한 공간적 심볼은 ‘옴팡밭(오목하게 파진 밭)’이다.
참혹했던 비극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순이삼촌은,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옴팡밭’이라는 물리적 장소이자 내면에 깊이 얽힌 트라우마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밭을 갈다 땅속에서 돋아나는 돋보기안경 알이나 탄피, 뼛조각들은 시간을 1949년으로 정지시키고, 그녀의 삶을 평생의 유배지로 만들어 버린다. 현기영은
순이삼촌의 환청과 신경통을 통해 4·3이 과거의 역사가 아닌 ‘특정 장소에 갇혀버린 현재 진행형의 트라우마’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최근의 대작 『제주도우다』에서 현기영은 학살 이전 중산간 지역에서 피어났던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완벽히 복원해 낸다. 심방의 굿소리가 울려 퍼지고, 곶자왈을
누비며 우마를 공동 방목하고, 숯을 굽고, 고사리를 채취하며 서로를 보살피던 ‘수눌음(품앗이)’ 공동체.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들이 불타오를 때 사라진 것은
가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주 민중들이 수 세기에 걸쳐 일구어온 생태적 삶의 양식과 인류학적 공동체의 완벽한 도살이었다.
옴팡밭 4·3사건 유적지 ⓒ 저자 촬영
다랑쉬굴 4·3사건 유적지(구좌읍 송당리) ⓒ 저자 촬영
이번 한 달 살기 동안 발로 찾아간 다크투어리즘 유적지들은 서늘한 바람으로 그날의 비극을 고요히 증언하고 있었다.
다랑쉬오름 아래, 풀숲에 덮인 다랑쉬굴 앞에 섰다. 1948년 겨울,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마을 주민 11명이 토벌대를 피해 숨어들었다가 굴 입구에서 피운 짚불 연기에
질식사당했던 그 음습한 입구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옆 다랑쉬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덤불 속에 뒹구는 맷돌 조각만이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쓸쓸히 증언하고
있었다.
해안가 마을이라 해서 비극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바닷가 아름다운 집들이 모여 살던 곤을동은 마을 전체가 불타버린 채 영구히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적막한 유적지로 남아 있다.
일제가 군사기지로 썼던 알뜨르 비행장 옆, 자그마한 섯알오름의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는 목이 메어왔다. 6·25전쟁 직후 황망하게 끌려가 총살당한 252명의
희생자들. 트럭에 실려 끌려가면서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을 친지들에게 알리고자 덜컹거리는 트럭 밖으로 벗어 던졌다는 검정 고무신들…. 길 위에 뒹굴었을 그 검정 고무신
수십 켤레의 신호는 그 어떤 통곡보다 더 강렬한 언어로 그날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있었다.
4·3사건이 끝난 후 살아남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폭도’, ‘빨갱이’라는 가혹한 사상적 낙인이 찍혔다. 중산간 지대는 단지 불탄 가옥에 그치지 않고 사상적 오염 지대로
격리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하나 짚어야겠다. 4·3사건 진압 직후 터진 한국전쟁에서 제주 청년 3만여 명이 대거 자진 입대했고, 그중 3,000여 명(해병
3·4기)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주축을 이루어 도솔산 지구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 총인구가 27~28만
명이었으니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는 4·3사건 당시 당국과 토벌대에 의해 씌워졌던 ‘빨갱이’라는 억울한 오명을 피로써 씻어내고자 했던 제주 청년들의
조용한, 그러나 처절한 심리적 몸부림 아니었을까?
현기영의 소설 역시 이 낙인을 벗겨내기 위한 도민들의 참혹한 침묵과 자기검열을 집중 조명한다. “사상에 휘말리지 마라”, “육지 사람(제주사람들은 제주 밖 한반도와 그곳
사람들을 통칭해서 이렇게 부른다) 만나면 제주 말을 쓰지 마라”며 자식들의 입을 막으려 했던 부모 세대의 한숨. 중산간 인구의 감소와 편재는 경제적 기회의 불균형
때문만이 아니라, 중산간에 살거나 연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존을 위협하는 사회적 형벌이 되었던 비극적 정치지리의 결과였던 것이다.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화북동) ⓒ 저자 촬영
지리학에서 ‘공간(space)’이 단순한 물리적 좌표라면, ‘장소(place)’는 그 땅을 거쳐 간 인간의 숨결과 기억이 축적되어 형성되는 인문학적 결정체이다. 제주
중산간 지대는 오랜 세월 제주인들이 외적을 피하고 한라산의 품에 안겨 생명을 이어가던 자생의 장소였다. 그러나 4·3사건이라는 참혹한 정치·사회적 폭력은 그 장소를
죽음의 공간으로 낙인찍어 버렸고, 그 결과 제주 섬의 인구 구도와 공간 구조는 해안 중심으로 파행적 편재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 제주 중산간은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과거의 국가 폭력이 중산간 공동체를 물리적으로 철거했다면, 현대의 무분별한 난개발과 자본의 유입은 중산간의 남아 있는
역사적 기억과 자연 생태를 또다시 상품화하고 파헤치고 있다. 대형 리조트와 골프장이 들어서는 중산간의 땅은 4·3의 아픔이 깃든 곶자왈과 불탄 마을의 터전이다. 중산간은
단순한 개발 가능한 쓸쓸한 임야가 아니다. 그곳은 조선시대 도민들이 터전을 잡았던 생존의 보루였으며, 4·3사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수만 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역사문화적 기억의 공간이다.
관광의 화려한 조명이 비추지 않는 제주의 숲과 오름, 그리고 불탄 돌담길을 걸으며 가만히 그분들의 명복을 빈다. ‘남’도 ‘북’도, ‘좌’도 ‘우’도 아닌 그저 제주의
흙으로 돌아간 수많은 ‘제주도우다’ 영령들에게, 발로 찾아온 지리학자의 작은 서사가 작으나마 위로와 기억의 돌탑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검정 고무신이 놓인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대정읍 상모리) ⓒ 저자 촬영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이자 동 대학원 다문화/상호문화 및 동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를 겸하고 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 지리·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도시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여행하는 지리학자로 장소-사람-문화의 관계와 그 속에 펼쳐지는 인간의 삶과 행복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경험하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강의하며 글을 쓴다. 저서로 『지리학자의 인문 여행』,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 역서로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공역), 『공간을 위하여』(공역), 『문화·장소·흔적: 문화지리로 세상 읽기』(공역) 등 다수가 있다.
월간 국토 창간일부터 현재까지 해당 코너의 글들을 한번에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