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미로에 갇힌 2,300억 ‘새주소 사업’

  • 작성일2004-10-01
  • 조회수547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 물류비용 절감까지.’ 새 주소가 표시된 지도로 집을 찾고 나서 손을 맞잡고 즐거워하는 남녀, 신이 나서 물건을 배달하는 택배회사 직원들, 신속하게 환자를 실어나르는 구급대원. 거리 전광판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행정자치부의 새주소사업 광고다. 비효율적인 기존의 ‘동·번지’ 주소체계를 바로잡고, 물류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정부의 이 야심찬 사업이 7년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쏟아부은 돈만 지난해 말까지 1천3백98억원. 앞으로 2009년까지 9백70억원 이상이 더 들어갈 예정이다. 빛고을길, 새싹길, 만남의 길, 지혜길…. 도로와 골목 입구, 집집마다 붙어 있는 팻말을 본 기억은 어렴풋하게 있겠지만, 자신의 집 주소가 2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지난주 서울시민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새주소사업을 알고 있다’는 사람은 33.0%에 불과했다. 우편물 등을 주고 받을 때 새 주소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은 9.0%였다. 그렇다면 길찾기가 직업인 택배회사 직원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행정자치부 새주소사업단의 자료(올 2·4분기)는 택배회사의 63%, 경찰의 84.3%, 소방서의 86.9%가 새 주소를 활용중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취재팀이 지난주 현대택배 직원 1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에 이르는 48.9%는 새주소사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새 주소만 갖고 배달했다는 직원은 4.4%에 그쳤다. 소방서와 경찰서 지구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새주소사업단은 “소방서와 지구대마다 새 주소 지도가 붙어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서울 광화문지구대 벽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관내 지도는 기존의 지번체계 지도였다. 경찰은 “새 주소 지도를 받아본 적도 없다”면서 “새 주소를 쓰라는 공문만 내려보내면 뭣하느냐”고 반문했다. 세종로 소방파출소도 마찬가지. 책상을 한참 뒤지더니 서랍 밑바닥에서 먼지 쌓인 지도책자 하나를 꺼냈다. 소방관은 “어차피 기존 지번체계로 구축된 컴퓨터시스템이 편리하게 활용되고 있어 새 주소를 쓸 일이 없다”고 설명했다. 더욱 큰 문제는 새 주소로는 편지조차 주고 받기 힘들다는 점이다. 취재팀이 시험삼아 새 주소로 빠른우편을 부쳐봤다. 보통 이틀이면 도착한다는 편지가 보낸 지 열흘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광화문우체국 관계자는 “새 주소로 배달해주려면 아주 애를 먹는다”며 “우편번호 체계도 바꾸고 전국적인 지적도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니다”라고 볼멘 소리를 했다. 새주소사업은 일제 때 만든 현재의 주소체계가 어렵고 무질서하다는 지적에 따라 1996년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이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행사 유치를 겨냥해 2000년까지 완료, 전국적으로 시행할 계획이었다. 이 사업이 표류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말 정권교체와 함께 기획단이 해체되면서부터다. 사업은 곧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국비지원 여부를 놓고 ‘국가 사업이다’, ‘지자체 사업이다’ 티격태격하면서 예산문제가 난항에 부딪쳤다. 여기에 원활치 못한 부처간 협의가 발목을 잡았다. 사업 정착을 위해 절대 협조가 필요한 정보통신부조차 “예산이 많이 들고 국민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결국 국비지원은 2000년부터 중단됐고, 행자부의 특별교부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자체 몫으로 떨어졌다. 행자부는 매년 전국 시·군·구를 대상으로 우수기관을 선정해 사업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지자체들은 “행자부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마지못해 하는 분위기다. 올해 처음 사업을 시작한다는 전라남도 담양군 관계자는 “재정문제 때문에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 6월 현재 새주소사업 착수율은 234개 시·군·구 중 148개 지역으로 63.2%에 이르지만 완료율은 35.8%에 불과하다. 애써 사업을 완료해놓은 지자체도 불만이다. 서울시는 시비 2백억원을 들여 2002년까지 새주소사업을 마쳤지만 시민 홍보는 거의 포기한 상태다. “주소란 게 전국적으로 시스템이 갖춰져야 쓰는 것이지, 서울시만 완료됐다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홍보비도 시비나 구비로 나가야 하는데….” 시 관계자는 “새주소사업은 ‘이미 실패한 사업’이란 인식이 있어서 시의회나 구의회의 승인을 받기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국가경쟁력기획단에서 새주소사업을 입안했던 국토연구원 박헌주 기획조정실장은 “의욕을 갖고 추진했던 사업이 정부 내에서조차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며 “사업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무용지물로 전락한 새 주소를 보며 한숨만 쉬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